◈아름다운산과들 의사진

달빛 진상에 비친일몰

효정이집 2008. 8. 29. 18:43
  • 글쓴이: 임채석


  • 달빛 잔상에 비친 등대


    그놈은 언제 왔을까.
    얼마나 괴로움을 주다 갈려고 또 찾아왔을까. 그놈이 올 때는 늘 누구를 달고 함께 온다. 마치 오래된 애인인 양 옆에 붙어 있고, 엷은 허공 떠도는 바람 안주 삼아 소주를 먹고 있을 때도 보란듯이 옆에 앉아 물끄럼 하게 쳐다보고 있다. 이름도 성도 희한한 "고독과 그리움"이란 이름의 불청객, 그놈이 오면 언제부터인가 바다를 지켜보는 등대로 간다.

    동해 바다를 두 동강낸 지점에 있는 물치항의 일몰, 파도 굉음에 놀라 비상하는 새들의 모습이 선홍빛 노을과 군무를 이룰 때, 태양을 사랑한 석양은, 동녘 하늘을 파랗게 적시다가, 절절히 붉히다가, 이미 정해진 헤어짐의 시간 앞에 허물어지고 있다. 솜털 같은 구름도 태양빛 지는 곳마다 벌겋게 멍이 들고, 산자락 곱게 덧칠하여 말없이 재우며, 작은 섬은 노을빛에 타들어 갈 때, 실루엣 감겨드는 푸른 물빛에, 지워진 바다를 태우려, 검은 핏빛으로 지고 있다.

    정밀한 고독 같은 바다, 내뱉는 하늘의 시간 속에서 날름거리는 혓바닥을 내밀어 지친 가슴을 쓸어내리고, 한없이 넘실대는 욕망을 잠재우며, 유수처럼 흘러가는 유한한 삶의 공허함을 뒤돌아 보게 한다. 인생은 허물이 가득하다. 숱한 사연들로 누적된 시간에 점철된 삶은, 추억 뒤로 넘기는 책갈피 같아, 어제도, 오늘도, 한 장의 공간에 낙서 된 삶의 의미를 내포한 기록을 지우고 가지런히 다시 태어나려는 것이다.

    "어린이가 자기만을 사랑해 달라고 하면 소년이 된 것이고
    자기뿐 아니라 고독함을 사랑하게 되면 청년이 된 것이다.
    그리고 고독이 사랑을 불러 온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른이 된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배우려 찾아온 등대는 검게 익어갈 밤바다 속에 혼자 있다. 어둠의 정령에 싸여 파도에 시달리며 외로움도 깃들지 못한 벽에 등을 기대고 바라보니 해풍에 닳아 누더기 같이 벌어진 항로 표지판의 처연함이 하루를 비켜가는 비루한 나그네가 던져 놓은 명찰을 단 듯 보이고, 치장하지 않은 몸은 남루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 모습에서 많은 사람이 고독에 순응하는 넉넉함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등대는 검푸른 밤을 헤쳐올 누군가를 위해 오늘도 뜬눈으로 밤을 새우려 하얀 불빛을 비추기 시작한다. 하얀 빛줄기 닿는 곳마다, 은빛 물결은 고즈넉한 마음을 설레게 하며 어두움 속에서 삶의 메시지를 던진다. 등대와 고독은 닮은 곳이 많다. 외딴곳에 오롯이 혼자 서있으며, 토해버린 세상의 아픔이 질펀해도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날들, 신경질적인 바다의 외로운 촉수를, 항상 한곳에서 지켜보는 것이 그러하다. 많은 시인이 고독함을 표현할 때 즐겨 사용하며 외로운 사람도 마치 조건반사처럼 고독을 읽는 것 또한, 그렇다. 그러나 안개 낀 망망대해에서 선원들에게 그만큼 반가운 불빛이 또 있을까?

    등대는 불빛으로 말을 한다. 그 색깔과 간격, 밝기를 달리하는 방법으로 선박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여 평생 어두운 밤바다를 안내하며 항해자의 눈과 이정표가 되어준다. 기항지를 향하는 안전한 불빛 속 희망의 전도사 되어 굳건한 모습으로 자연에 귀 기울이며 자연이 허락한 오늘을 지켜보고 있다.

    소멸 직전의 척박한 심성에 시달리던 시간 속, 혼절한 침묵 속에 침몰 시키듯 잊어버리고, 석양이 내어준 노란 살이 가득 차오른 보름달이 선선한 바람 아우르며 등대를 쳐다보고 있다. 바다와 산, 마을에 시리도록 밝게 깔린 달빛의, 희고도 고운 자태는 영락없는 외로운 기도를 시작하는 하늘의 축복 같아 한참을 쳐다본다. 눈에 넣으면 건듯 스치는 굶주림 속으로 감출까 두려워 멀리 눈을 들어보니 마음 기차를 따라간 하늘 정원의 호수를 보는 것 같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구름도 살짝 도망가고 먼 마을의 등불도 숨죽이고 잠이 들었나 보다.

    파도는 어두움을 빙자해 기도가 시작되는 방파제에 심술을 부린다. 집채 같은 심술로 밀어붙이고 짜디짠 소금 바람으로 얼굴을 때린다. 지난 세월을 통해서 발견한 것은 적막한 시간에 흘려버린 외로움에 지친 투혼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것들과의 인의 적 관계에서 적절치 못한 처방으로 고통받았던 상처였다. 관계의 결핍, 관계의 왜곡에서 오는 그 병은 나를 돌아보는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시기의 관계를 체험하면서 남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현실을 돌아본다.

    쭈그리고 앉은 자리에 밤의 정령이 고독의 넉넉함으로 다가온다. 서로 부르다 지쳐 가슴 파랗게 멍들어 절절히 보고 싶어 눈물 훔치다 만 얼굴도, 외로움에 젖은 영혼도, 홀로 잠들지 못한 번뇌도, 모두 가져가는 것 같다. 그 커다란 눈빛은 격랑에 이는 바람 따라 날려 보내고 힘겹게 지내온 시간도, 헤쳐 나아갈 시간도, 피하지도 말고 인생을 그렇게 가라고 하는 것 같다.

    차오르는 밀물에 목이 잠기고, 환한 외로움이 솟구쳐 올라도, 잠들지 못하는 영혼 버리고, 봄이면 고기떼 돌아오듯 그리운 그 이름, 희망, 사랑으로 돌아오리라. 자유와 외로움을 만끽하는 물 치에서 만난, 황혼빛에 물든 등대는, 어부들의 삶이 진하게 묻어나는 바다에서, 지나간 시간이 흘리고 간, 외로움에 찌든 영혼을, 평온한 쉼터로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리고 인생의 길을 밝히는, 아름다운 동반자의 사랑도, 오래도록 영혼의 불빛으로 내 가슴에 깜박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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