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님들의 시 와낭송모음집 부끄러운 연서(戀書)- 유안진 효정이집 2008. 9. 8. 13:52 잊었던 사람에게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씁니다무릎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씁니다부치지 못할 긴 사연을이 작은 가슴마저 시려드는 밤엔임자없는 한 줄의 시를 찾아 나서노니잊었던 사람이여이 한 구절이 문득 떠오르면서 잇달아 그대 또한 내 영혼의 냇물을 서서히 거슬러 올라와 조용히 떠오르는 그립고 쓸쓸한 달빛으로 찾아 오는것은 또 어쩐 일인가요?나는 분명 그대를 잊었습니다.아주오래 전 오래 전에 이미 그것은 내가 내 자신에게 명령하고 강요한 나의 자존심이며 복수의 행위 였습니다.봄바람에 어지러이 피어나는 꽃과 잎을 볼 적마다 증오의 불길을 부채질했습니다.불타는 한여름의 대낮 뙤약볕을 이고 걷고 걸으면서 보복하리라 다짐하고 거듭 다짐했습니다.그러나 어째선지 해마다 가을 찬바람을 받고 영롱하고 투명한 가을 하늘 아래 서면 번번히 그대를 용서할 수 밖에 없습니다.무주구천동 아흔아홉 구비를 오르내리며 지난 밤 내 영혼은 이미 긴긴 사연을 쓰고 다시 써 놓았음을 나는 미처 몰랐습니다.계곡을 돌아치는 청아한 물결 소리에 이름 모를 비구니의 독경 소리에 이끌려 잠못 청하던 내 영혼이 떠돌며 방황했던 길목마다 산모퉁이 마다 붉은 낙엽은 쌓여 있었습니다.맨발로 걸어다닌 징검다리 위에도 단풍잎은 피묻은 발자국처럼 떨어져 있었고 다리 아래 물결에도 차마 떠나지 못하고 머뭇대는 부끄러운 연서가 맴돌고 있었습니다.그 것은 그대로 나의 진실이었습니다.다시금 그리워 오는 이여이 가을에 나는 가랑잎 한 잎에서 그대를 만나보며 거듭 용서합니다.미움이나 사랑이나 연민마저도 억지로는 아니되는 아니되는 것임을 내 영혼이 그 피로 써 놓은 낙엽 편지를 보고 나서 비로서 깨달았습니다. 무릎이 시린 내 영혼의 방랑 끝에 또 다시 불러보는 그리운 이름을 천 잎 만 잎 가랑잎에 새기면서 그대 지금 지구 끝 어느곳에서 내 영혼의 해후를 스치는 낙엽으로 짚어 헤아리라 믿어봅니다.시고 떫은 갈무리되지 못한 내 피를 삭여주는 눈부신 가을 볕과, 서럽고 안타까운 푸르른 달빛에 몸서리치는 감성과 이성의 곤두박질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거듭하고 나서 빛 붉은 낙엽으로 몸을 눕히는 사랑의 제단, 가을 언덕에 서면 소리쳐 불러보고 싶은 이름이 있다는 슬픔도 감사하게 받아 들여집니다.지나온 날의 미움이 오히려 미안스러워지고다짐했던 복수도 후회스럽다 여겨집니다. 다만 오직 한가지는못내 그대가 그리울 뿐이라는 것.신이여, 당신을 두고 맹세했던 나의 복수를 지워 주옵소서.나는 용서할 수 밖에 없습니다.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 새삼 증오하고 다시 용서하는 변덕 스러움을 허물지 말으소서.지우고 싶은 이름이여나는 그대를 용서 합니다.서리 내리는 가을 언덕에 혼자 서면 새삼 굽어보는 빛 붉은 낙엽의 천지.내 진실이 그대에게 써 놓은 부치지 못한 긴 사연들.불자의 미소같이 쓸쓸히 웃으며 나는 잊기로 하고 그리하여 용서했습니다.가을 바람 한자락을 빈 가슴에 담아 놓고 나는 돌아섭니다.이제부터는 가슴마다 긴긴 밤이 열릴 것입니다.나는 다시 임자없는 한 줄의 시를 찾아나설 것입니다.이 시린 가슴을 채우고 덥힐 한 구절의 시를 찾아 나의 길을 떠날 것입니다.부끄러운 연서(戀書)- 유안진